사람들이 우만컴퍼니의 활동을 이야기하며 “왜 여성 이야기를 하냐.” 묻는다.
나는 “제가 여성이니까요.”라고 답한다.
청년, 레즈비언, 지역 문화기획자 등 여러 정체성이 있지만, 삶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온전한 나의 정체성은 여성의 삶이었다.
나는 레즈비언이지만 단 한 번도 ‘레즈비언’의 삶을 산다고 느껴보지 못했다. 부정-디나이얼-이 아니라 레즈비언-소수자로 말해질 때 예상되는 투쟁이 없었던 것이다. 최초의 커밍아웃이었던 엄마의 반응도, 31살의 나이에 사별하고 혼자 자식 둘을 키우며 ‘정상가족’이라는 정상성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그에게 ‘이성애의 정상성’은 어떤 것도 아니었기에 시시했었다.
만나는 상대가 아웃팅 당하거나 나와 함께 노는 친구들의 정체성을 왜곡할까 봐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거나 차별받을 것을 걱정하며 정체성을 숨겨본 경험이 부재한 나는 어쩌면 ‘소수자성’을 경험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의도 없는 정치적인 행위도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청년 역시 마찬가지다. ‘청년’이라 말해질 때 표상처럼 느껴지는 ‘남성성’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얼굴이며, 사회가 원하는 경제적 여유는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고 열정페이도 마다않는 청년의 얼굴은 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달랐다.
여성에게 행해지는 폭력적인 상황에서 친구들의, 엄마의, 이모들의 얼굴에 스치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나는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긴말하지 않아도, 마주치는 눈빛 하나만으로 때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비언어적인 모든 요소를 통해 여성들이 느끼는 부정과 부당함을 느낄 수 있다.
페미니즘을 모르고 언어화되지 않았을 때부터, 피부로 체득한 것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그 근원은 가장 친밀한 사람인 엄마가 당하는 부정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우리 집의 가장이었던 엄마는 남들의 눈에는 가장이 아니었다. 모두가 자기 아버지와 남편을 이야기할 때, 엄마가 해준 것을 이야기하면 ‘대단하시네’라고 하지만 동등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엄마가 가장이 아니라 경제활동원이었을 뿐이다. ‘2등 가장’ 혹은 반쪽 가장. 진짜 가장을 기다리는 대리 가장. 가부장의 사회에서 인정될 수 없는 가장. 그러다 보니 반쪽 가장의 막내 딸은 자신의 말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 했었다.
부당하다는 걸 부당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여성이 말하는 성차별의 부당함, 지방대생이 말하는 학력차별의 부당함, 저소득층이 말하는 ‘부’의 부조리함은 피해의식으로 비친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싫었다.
여성을 향한 폭력은, 부당함은 늘 남성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거나 남성적 시선에 의해 가해졌다.
이런 걸 뼈저리게 느끼며 자란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언어가 나의 삶에 오기 전에도 남성보다 여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었다. 그러다 페미니즘이나 여성의 언어를 발견했을 땐, 말로 할 수 없는 쾌감이 있었다.
‘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게 이거구나.’
‘내가 느껴왔던 게 이거구나.’
그러니 내가 여성에 대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히려 사회 속에 만무한 남성 이야기에 대해서는 왜 아직도 남성을 이야기하냐고 묻지 않는지가 더 궁금하다. 나는 가끔 가부장제의 사회에 막대한 빚이라도 내준 채권자처럼 이 사회의 부조리함 속에서 당신들이 얻은 이익에 대해 따져 묻고 싶어진다. 언젠가 이 모든 빚의 이자까지 받아낼 생각이다. 그것도 9부로.
최근 6년을 구독하던 신문을 최근 구독 해지했다. 그 이유가 최근 신문 오피니언에서부터 사설까지의, 3장-6쪽이 넘는 페이지 속에서 여성 필자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을 때의 징그러움 때문이었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이해하며, 자신의 혹은 다른 여성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한번은 눈을 마주쳤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