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길.
아파트 단지의 담장을 붉게 물든 장미꽃. 가까이 다가서 잎을 만지니 빨강 잎이 후드득 손안에 떨어져 버렸다. 장미가 시들고 있다.
과거의 장미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선명하게 아름다웠던 그 현재는 과거가 되었고
앞으로 시들 미래는 지금, 현재로 다가왔다.
찬란할 때는 시들 것을 걱정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에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찬란했던 장미의 계절을 붙들고 싶지만 영원하지 않으리라 생각은 못 했고 그 순간을 붙들고 싶다.
우리는 추억을 느끼기 위해 사진을 찍어 과거를 현재로 붙들어 놓는다.
하지만 수많은 사진은 폐기 처분을 기다리며 곰팡이 가득 피어난 파일 속에 묻어 있다. 파일은 과거의 무덤일 뿐이다. 계속 누적될 뿐이다. 팽창되는 우주처럼 가득 차고 넘쳐날 것이다.
밤 산책하는 여기에서 충실함을 가져야 하지만
걷는 동안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복기한다. 내일 일을 걱정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몸은 멍하게 공간을 떠다니고 머리는 생각의 공장을 '풀가동'한다.
과거의 망상은 나를 괴롭히고
미래의 불안은 나를 힘들게 한다.
생각을 멈추고 지금 여기에 집중한다.
피부에 닿는 바람은 차갑고 손등의 가는 털들마저 흔들리게 하고
떼는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아스팔트의 질감이 내 장딴지 가득 긴장하게 하고, 콧속으로 들어가는 차가움과 뱉어지는 따뜻한 숨결과 그 숨이 몸에서 들고나가며 몸의 긴장을 풀어낸다. 소란스러운 자동차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 학교를 떠나지 못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들이 버무려져 청각을 자극한다.
내 감각에 집중한다. 그동안 생각은 사라지고 현재 나와 세상과 감각만이 있을 뿐이다.
단단하게 생각으로 날이 선 피로감은 사라진다. 그 좋은 기운을 알아차린다.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판단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여기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찬란한 장미도, 좋았던 아름다운 추억도
그저 구름이 흘러가듯 붙잡지 말고 놔두면 된다.
현재를 인식하고 충분히 지금을 즐기면 된다. 그 무엇이 되든지.
이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