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14주기 추도식-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의 영상을 글로 남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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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 코멘트
나는 그날 왜 이 영상을 글로 남기고 싶었을까, 덕분에 가끔 이 음성을 눈으로 듣는다. 18년의 여정이 귀하고 고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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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추도사가 아니라 지난 가을 저 앞에 있는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을 개관함으로써 묘역 공사가 14년 만에 완공되었음을 노무현 대통령님께 보고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14년 전 이날 부여 시골집에서 잡초를 뽑다가 서거 소식을 접하고 방송을 통해서 유서에 남긴 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 놓아라'는 구절을 대하면서 이때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은 속으로 '유홍준 청장에게 부탁해서'라고 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즉시 저는 봉화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권양숙 여사님과 문재인 장례위원장을 만나서 이 일을 제가 맡겠다고 자원을 하고 작은 비석 건립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가는 문화 예술인으로 구성했습니다. 건축가 고 정기용. 승효상. 조경설계가 정영선. 역사학자 안병욱. 화가 이목상. 시인 황지우 그리고 김경수 비서관이 실무를 맡았습니다. 따로 마련된 예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얼마가 들든 경비를 어디서 조달하든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 이 시대 문화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부끄러움 없는 공간으로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옛말에 후대 사람이 오늘을 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옛날을 보는 것과 똑같다는 말을 머리에 새기면서 후대인들이 여기 찾아올 것을 머리에 그렸습니다. 그리하여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말한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 여덟 글자,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을 이 묘역의 기본 미학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통에 기초한 현대 묘역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마하트마 간디. 호찌민. 발터 베냐민 등 세계 유명 묘역 30곳을 검토하였고 삼국 고려 조선시대 왕릉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것은 고구려 시대의 고인돌에 근거해서 봉분을 너럭바위로 새기고 무덤 위에는 지관스님이 꾸밈없는 글씨체로 쓴 '대통령 노무현' 여섯 글자만 새겼습니다. 무덤 안에는 납골함과 지석 그리고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 담긴 CD를 봉환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참여정부의 철학도 담았습니다. 제가 문화재청장으로 부임되고 얼마 안 되어 노 대통령은 어느 날 저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화재청장도 참여정부의 국정 기본 방향을 알아야 한다면서 첫째는 정경유착 뿌리 뽑는다. 나는 기업인 돈도 안 받고 세무사찰도 안 하겠다. 둘째는 영호남 갈등 해소다. 셋째는 지방분권으로 지방의 힘을 키우겠다. 그러면서 저에게 은퇴하면 지방에 가서 좋은 책을 써서 명작의 고향을 만들라면서 가능하면 어느 외딴섬 가서 살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섬으로 귀향은 못 가겠기에 부여로 가서 문화유산을 안내하면서 지금 지내고 있습니다. 넷째는 특권과 반칙을 뿌리 뽑기 위해서 권력기관 힘을 빼는 건데 이게 제일 어렵다고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까지가 권력기관입니까라고 물으니 검찰청. 경찰청. 국정원. 국세청 그러시면서 한마디로 말해서 전화 왔는데 기분 나쁘면 다 권력기관이다 그러셨습니다. 납골함은 우리 시대의 최고가는 도예가 박용수의 백자함에 조각가 안규철의 연꽃 모양의 석함으로 만들고 CD 보관함은 원로 도예가 김익영의 백자함 지석은 유명한 보령 오석에 새겼습니다. 이 모두가 기증받은 것이었습니다. 시공은 인간문화재 후보인 윤태중 석공이 했습니다. 오십 미터의 코르텐강 강판으로 곡장을 설치한 것은 왕릉에 준하는 존엄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묘역은 전국 도로망의 이미지를 팔도로 구획하고 그 사이에 종묘 월대처럼 박석으로 장식했습니다. 박석은 고창. 해남. 부여. 울산 등 전국 팔도에서 가져오고 경복궁, 광화문 앞 월대를 장식했던 박석 상징인 강화도 박석과 황해도 해주 박석까지 실어 왔습니다. 이 모두가 지자체 단체장과 석재상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었습니다. 문화재청이 권력기관이라 강제한 것이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 쓴다고 하니까 모두가 자진해서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추모 기관에 전국 곳곳의 담벼락과 아스팔트 위를 장식했던 노란 리본의 추도문을 박석에 새기는 것으로 아주 작은 비석을 대신하기로 하였습니다. 박석에 추도사를 새긴 분은 이름과 함께 성금을 내준 것으로 묘역 공사에 든 모든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안토니오 가우디 사후 입장료로 계속 완공해 가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묘역은 박석에 추도사를 헌정한 국민 성금으로 이루어졌다는 또 다른 전설적인 기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궁할 때 쓰려고 아직 팔지 않은 박석이 사천장 남아있습니다. 작은 비석 건립 위원회는 이렇게 임무를 끝냈지만 묘역 공사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주변 녹지와 공원 그리고 대통령 기념관을 위하여 봉화마을 공간 조성 위원회로 확대해서 계속 일했습니다. 이때 문재인 대통령도 위원으로 제 밑에서 일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앉아있는 자연생태공원부터 주변에 식재된 나무들 봉화마을의 정비 사업 여민관을 비롯한 부속 건물 건립 모두가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정성스럽게 계획되고 검토되고 시공되어 오늘의 노무현 대통령 묘역이 조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이 완공되어 유품과 영상 자료로 노 대통령의 삶과 유업을 기리는 공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기념관 준공과 함께 작년 가을 봉화마을 공간 조성 위원회가 해체되었습니다. 저는 이 묘역 공사에 우리나라에서 최고가는 전문가들이 수없이 봉화마을을 내려와 논의했던 그 헌신적인 봉사와 예술가들의 흔쾌한 기증 그리고 국민 성금으로 이루어졌음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께 보고드리는 것이 그분들의 노고에 값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참여정부에서 4년간 문화재청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사후 14년간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지내고 이제 비로소 18년 만에 청장에서 해임된 기분을 갖고 있습니다. 묘역 조성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을 새기는 일이었습니다. 글씨는 노 대통령의 학교 선배이기도 한 신영복 선생에게 위촉해 놓았지만 어떤 구절을 새길까 고민고민하고 대통령의 저서를 모두 찾아 읽다가 노무현 대통령께서 국민들에게 한없이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 글을 새겼습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촛불 혁명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지금 우리는 역사는 더디다, 그러나 진보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을 새기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