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많은 것보다 사람에게 치이는 게 힘들었다.
매번 하는 같은 일을 이랬다저랬다 일관성 없이 지시하는 상사, 일은 떠넘기며 공만 가로채는 동료, 누가 봐도 아닌 규정을 억지로 갖다 붙이며 처리 안 해주면 청와대에 고소(!) 하겠다는 민원인. 사람들 얼굴만큼 생각도 천차만별이고 마음도 오리무중이다. 그래서였다. 알고 싶어서, 사람의 보이지 않는 생각과 마음을 알고 싶어서 심리 상담을 공부했다.
꼰대 상사, 얍삽한 동료, 진상 민원인들 때문에 답답한 한편 무엇이 그 사람들을 자신만 보고 살게 하는지 궁금했다. 더하여 재난현장에서 복합적인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소방관들의 정신건강에 대해서 걱정이 컸기에 더욱 알고 싶었다. 그리 홧김에 시작한 공부였지만 알아야 할 범위는 넓고 끝이 없었다. 이상심리, 발달심리, 성격심리, 심리검사 등과 더불어 두뇌계발, 정신분석에서 상담 스킬의 새로운 트렌드까지 글자 그대로 무궁무진했다.
요즘 사람들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MBTI의 세계도 그때는 새로웠고 고급 타로 마스터 자격을 딸 때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심리를 타로로 다 읽어 내고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치기로 충만하기도 했다. 막 배운 상담 스킬로 아는 사람들 진로코칭도 해주고 잘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상담실습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5학기를 마치고 학위증을 손에 받은 순간 들은 생각은 ‘내가 그간 석사과정을 공부했구나’였다. 그만큼 공부는 재미있고 보람 있었다. 20년 동안 근무했던 소방을 떠나 상담계로 이직할까 생각이 들 만큼.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게 있었다.
한 사람의 성장과 변화를 지켜보는 보람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돌아가서 살아갈 환경에 변함이 없다면 그 변화가 안정적일까? 그대로 해피엔딩일까?
그런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결국은 소방조직 내에서 뭔가 개인 차원이 아닌 시스템이 변화하고 성장하여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2012년 동료 구조 대원이 순직하였다.
출동인원이 적고 장비가 열악하여 현장 인원 부족으로 베테랑 구조 대원이 없는 상태에서 위험한 구조활동을 하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국민도 위험하고 소방관도 위험한 이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동료들과 함께 소방공무원 국가직 전환 이슈를 만들고 결국 현재 소방은 국가직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죽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018년 구급 대원이 주취자에게 폭언·폭행을 당한 이후 뇌출혈로 순직하였다. 그런데 억울했던 것은 국가는 그 죽음이 위험 순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동료의 억울한 죽음이 나의 미래일 수도 있기에 다시 천여 명의 소방관들이 국회와 인사혁신처 앞에서 1인 시위와 함께 목이 쉬도록 언론 인터뷰를 했다. ‘피는 펜보다 강하다’라는 슬로건으로 현장의 피땀을 책상에서 펜으로 기획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호소를 하였고 국민들의 많은 지지와 응원 덕분에 구급 대원의 위험 순직이 인정되었다.
그 후 노조가 법적으로 허용되고 난 후 소방관 노조를 설립하고 처우개선과 소방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소방정책으로 그렇게 원하던 ‘시스템을 바꾸어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게 되니 정년퇴직을 하는데 아쉬움이 없었다.
하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일’을 하면서 그간 느낀 점이 많았다. 그 시스템도 종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시스템을 잘 만들어 놓아도 그 일을 맡거나 같이 거드는 사람의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결과가 건강하지 않았다. 마음이 쭈그러지고 그늘이 지면 일도 이지러지고 시들어갔다.
사람이 시스템을 만들지만 그 시스템이 알아서 굴러갈 리는 만무하고 그 시스템 또한 사람이 굴리는 것이기에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온 우주가 오는 것이기에.
사람 곁에서, 수억 우주의 성장을 지켜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