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셋 정희는 환자복을 입고 병원에 있다. 일상에서 하혈이 심해 자궁 수술을 마친 참이었다. 남편은 사업을 이유로 밤낮없이 바쁘고, 아이가 넷이나 있지만 아직 학생들이며 병원에는 혼자다.
어쩐 일인지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을 째고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둘째 딸이 찾았다. 둘째 딸이 본 엄마는 90도 정도 허리를 굽히고 힘겹게 화장실을 가는 모습이었다. 고3 딸은 화장실에 앉아 있는 엄마를 향해 “공부하기 힘들어!” 시작으로 투덜투덜 댔다. 병상에 있는 엄마가 아니라 집에 있는 엄마로만 보였다.
정희는 별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뛰고 날라 고3 둘째 딸의 나이가 쉰둘이 되었다. 33년 전 엄마가 있는 그 병실의 온도까지 기억할 만큼 생생한데, 자주 그 순간이 떠올라 스스로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마흔셋 엄마는 어땠을까. 수술하고 누워있던 엄마에게 자식이 찾아와 화장실까지 힘겹게 걸어가는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았던 딸의 모습이 얼마나 매정하다 생각이 들었을까.
요즘 중년의 주위 사람들에게 듣는 말이
“자식이라고 있는 게 어쩜 그리도 무심한지 모르겠어.”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아니?” 등 자녀들에 대한 불만이다.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무심했던 열아홉 내가 떠오른다.
마흔셋의 엄마에게도 그렇게 불만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듯하다.
정희는 이제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하고, 잘 해왔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어색해 자신감이 떨어져 스스로 무엇이든 하기를 꺼려 한다. 딸 넷을 낳기 얼마나 잘 한지 모르겠다며 자식들 볼 때 가장 행복하다는 정희는 아기가 되려고 마음먹고 엄청난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이 유한적이라는 것과 자식의 모든 허물을 조건 없이 수용하는 부모의 마음이 무한이라는 사실을 오십이 넘어서야 알게 되는 요즘, 마냥 서글프다.
마흔셋 정희야,
쉰둘이 된 내가 본 너는 얼마나 어른스러웠는지 모른단다.
너무 빨리 아이가 되려고 하지 마.
나랑 좀 더 까불고 놀아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