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을 포함하여 총 5명이 글을 쓰는 소다공장이 4주의 시간을 보내고 기어이 다시 나에게 돌아와 글을 쓰라고 재촉해온다.
분명 4주 전의 나는 두 번째 글을 잘 준비하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다짐했었다. 그러나 새해 계획이 그러하듯, 오만하게 낮잠 자는 토끼를 지나가는 거북이처럼 시간은 언제나 계획과 실행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만 원이 열 번 모이면 십만 원이고 그것이 열 번 모이면 백만 원이라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 가지만 지갑으론 아직도 납득이 안 가는 어른이 된 것처럼, 소다공장의 글을 4번이나 발행하고도 -심지어 나는 발행인인데- 내 차례가 된 시간의 속도가 ‘누가 나를 약 올리려고 빼놓은 거 아닌가.’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월말의 카드 사용내역서를 보며 자신이 쓴 것이 맞음을 확인 사살을 당한 사람처럼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소다공장의 고지서를 앞두고, 친구 A에게 몇 가지 주제를 던지며 무엇이 재밌을지 물어보았다.
- 전 애인들이 나에게 남긴 것
- 사람 사이에서 추접해지지 않는 방법
등등
A의 전 애인이 말했듯-엄밀히 말하면 글을 썼듯-“도도한 줄 몰라서 섹시한” A는 미나리 삼겹살을 뒤집으며 들은 듯 만 듯하더니 “차라리 네가 추접했던 순간들이 더 재밌을 듯”이라고 답했다.
모든 후보가 탈락한 상황에서, 나는 머쓱해진 속을 구워진 미나리로 채웠다.
A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밸런스 게임’을 하며 질문과 대답을 빙자하며 자신의 취향을 확고히 하는 걸 즐겼고, 세상사에서 만난 아둔한 사람의 지겨움을 논하면서도 결국 제일 어리석고 추접한 건 자신이라며 실토하는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A는 늘 사람의 이면을 보고 싶어 했다.
예를 들어,
“나은아, 너 짝사랑해 본 적 있어?”
“아니.”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짝사랑해서 울어봤다면 진짜 재밌었을 텐데.”
이런 식이다.
평소엔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을 것이었으나 기어이 새 한 마리라도 보겠다고 다짐하며 망원경을 들고 탐조를 나온 사람처럼 글의 소재를 확정하고자 혈안이 된 나에게 A의 태도는 눈에 띄었다.
‘왜 남이 추접했던 게 재밌을까.’
그러다 ‘틈’을 떠올렸다.
틈이란 것은 무엇과 무엇 사이, 깨지거나 벌어진 혹은 애초에 떨어져 있었던 것들의 ‘사이’이다.
틈을 통해 바람이 불거나 햇볕이 들어오기도 하고, 때로 안의 내용이 쏟아져 나가기도 한다. 채워질 수도, 비워질 수도 있는 중의적인 하나의 공간인 셈이다. 이 틈이라는 개념은 늘 ‘나는 왜 이럴까, 저 사람을 왜 그럴까’의 질문을 계속하던 몇 년 전의 나에게 큰 대답이 되기도 했었다.
자신에 대한 탐구에서 벗어나며 자연스레 멀어진 단어인 ‘틈’이 떠오른 이유는 A가 누군가의 이면에서 포착하고 싶어하는 건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사랑은 결국 그 사람의 본질에 나의 환상을 조금 섞는 것인데, 그러려면 상상력이 스며드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A, 이 자식…. 생각보다 낭만주의인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프로이트와 융을 결별시킨 이런 어리석은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왼손의 투쟁』, 정한아(안온북스) 참고
다만, 조금 더 질문을 이어봤다.
‘나는 이걸 어떻게 이해-혹은 망상-하고 있을까?’
답은 간결하다. 내가 군산을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군산에 처음 왔을 때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틈 사이로 자라는 나무와 깨져있는 건물 그리고 열려있는 것도 닫혀있는 것도 아닌 공간들이었다. 그 안에서 나만의 군산을 읽었다.
여기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여기서 누군가도 저걸 봤을까,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나무는 어디에서 왔을까, 얼마나 살 수 있을까.
그런 상상과 함께 군산을 걷거나 지나치며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역’이란 단어는 군산에 와서 내가 가장 많이 말하고 들으며 체득한 단어인데, 그 과정에 군산의 틈을 발견한 시간이 있다.
소다공장은 은유가 아닌 ‘보여주는’ 직관의 공간-지면이니 여기, 내가 기록을 남겨뒀던 틈을 여러분께 보여주려 한다. 더 많은 틈을 발견했을 테지만 무형의 기억은 유형의 공간에 쓸 수 없으므로 배제하고 기록으로 남은 몇 가지 사진에 기반하여 여러분에게 나의 군산을 여러분에게 공개해 본다.
이 모습은 반듯한 도시의 모습도, 관광지로서 자랑스러운 면모도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이면을 보고 곁을 내주는 A처럼 누군가에겐 사랑스럽게 보이길 기대한다.
다소 스크롤이 길 수 있다.
*옛말로 ‘스압주의’. 캡션도 꼭 읽어주세요.